작가 유수미가 캔버스에 흔적을 남기는 법
“작업을 통해서 단단해지는 내가 좋아요.” 아크릴 물감이 굳은 스크래퍼를 들고 작가가 담담히 말했다. 줄지어 선 화폭들도 강렬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유수미 작가의 선명한 눈빛이었다. 8월의 어느 날, 그녀가 견고하게 쌓아올린 흔적을 따라 가봤다.출처 :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
유수미 작가의 작품은 어렸을 적 살던 동네의 담벼락을 닮았다. 동네 꼬마들이 제각기 그려낸 흔적처럼 너른 캔버스 위로 다양한 그림들이 펼쳐진다. 색도 형태도 즉흥적이고 자유롭지만, 그 위에 다시 덧그려진 선과 색채 때문에 밑그림은 일부만 드러난다. 그렇게 서로 겹치고 가려진 흔적들이, 결국엔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나의 화면을 완성한다.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방배동 작업실을 찾았다. 건물 1층 미용실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조용하고 아담한 작가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도 표지판을 연상시키는 그림부터 심해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빛까지 형형색색의 화면들, 그 앞에 반가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유수미 작가가 서 있었다.
순간의 감정을
뿌리고 덮고 긁는다
유수미 작가 작품의 핵심은 ‘덧칠’이다. 순간적인 감정을 화면에 고스란히 녹여내는 그는 밑그림을 그린 뒤 그 위로 또 다른 물감과 선을 덧입힌다. 한 획을 긋는 짧은 순간에도 감정은 수십 번씩 변하기에, 한 작업이 몇 달씩 걸린다는 작품은 그 시간의 변화를 고스란히 품는다.
“제 그림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순간을 모두 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느 시기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부정적인 감정도 피하지 않는다. 왼손잡이 교정을 강요받아 괴로웠던 것도, 다리가 부러져 반년 동안 휠체어 생활을 했던 것도 이제는 모두 작품으로 승화된 기억이다. 감정을 흘려보낼 창구였던 화폭은 어느새 삶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었다.
작가의 표현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과감하다. 아크릴 물감을 화폭에 흩뿌린 뒤, 방울진 물감 덩어리를 스크래퍼로 밀어내며 서서히 화면을 채워간다. 작업 전 구상이나 스케치는 따로 없다.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시작하는 탓에 그림을 망치는 일도 흔하다.
“여길 보면 미처 긁어내지 못한 아크릴 물감이 뭉쳐 있어요. 예전엔 이걸 가리기 위해 색감이 섞인 모래로 덮곤 했어요.”
스스로 ‘가리기 위한 덧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 그는, 이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조차 자신의 흔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말한다.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유수미 작가가 추구하는 화풍이다.
자유로운 해석정해진 답 없는 그림그림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순간의 손동작과 감정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누군가 작품의 의도를 설명해 달라고 하면 난감하다”며 웃었다.작품에 특별한 의도를 두지 않는다는 건 곧 정해진 답이 없다는 뜻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각자 자유롭게 작품 속 세계를 해석하고 소통한다. 특히 그는 추상미술의 매력이 누구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알 수 없는 점이라고 했다. 어떤 아이가 그의 그림을 보고 ‘강아지’라 했는데, 본인에게 그 그림이 어느 날 ‘꽃밭’처럼 보였을 때조차 흥미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로운 해석은 종종 뜻밖의 공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는 이와 관련해 작년 홍콩 아트페어에서 있었던 경험을 전했다. “라스베이거스 여행에서 느낀 순간을 담은 작품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관람객이 제 그림을 보더니 ‘나도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때 느낀 감정’이라며 곧장 작품을 구매했어요.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지요.”유수미 작가는 앞으로의 목표도 덧붙였다. “백남준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작업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예정입니다.”그녀의 여정은 곧 열릴 여러 전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9월에는 키아프 서울, 10월과 11월에는 각각 타이페이와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그리고 12월 3일부터 23일까지는 방배동 써포먼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저작권자 © 여성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출처 :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